ai 투자 : 영화 〈마지막 황제〉(1988)를 30여 년 만에 다시 봤다. 놀랐다. 10대 시절 내가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 거의 대부분이 영어 대사로 이뤄졌다. 자금성 안에서 환관들이 영어를 하고, 황후들이 영어로 말한다. 마지막 황제 푸이도 영어를 한다.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말처럼 〈마지막 황제〉는 서양 관객을 대상으로 한 영화였다. 따라서 영어는 성공을 위한 필수적 선택이었을 것이다. 나이 먹은 탓일까.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적응하기 어려웠다.

ai주식/주식ai : 그건 그렇다 치자. 작가 앤드루 오헤이건은 “모든 예술은 완성된 시점부터 동시대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어떤 것은 훌륭하게 나이 먹는 반면 어떤 것은 볼품없게 늙어간다”라고 썼다. 그의 구분법을 빌린다면 글쎄, 〈마지막 황제〉는 후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아카데미에서 9개 부문을 휩쓸기는 했지만 당시 유행하던 오리엔탈리즘 '버프'를 받았던 덕이 크지 않나 싶다.

여전히 빛나는 요소는 있었다. 바로 음악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마지막 황제〉의 OST는 사카모토 류이치가 맡았다. 물론 그가 전부 작곡한 것은 아니다. 총 18곡 중 9곡을 만들었다. 따라서 아카데미 음악상 수상자는 정확히 말해 사카모토 류이치, 토킹 헤즈(Talking Heads) 출신인 데이비드 번, 그리고 중국 작곡가인 총쑤 이렇게 세 명이다. 뒤의 두 명은 각각 다섯 곡, 한 곡을 창작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마지막 황제〉를 하나의 곡으로 소환한다. 영화에서 후궁이 “이혼해요”라고 외친 뒤 집을 뛰쳐나갈 때 흐르는 바로 그 곡, ‘레인(Rain)’이다. 기실 영화의 음악은 사카모토 류이치가 맡을 예정이 아니었다. 한데 촬영이 다 끝나고 한참 지난 어느 날 갑작스럽게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일주일 안에 음악을 만들어주세요.” 사카모토 류이치는 ‘2주일은 필요하다’는 조건과 함께 승낙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이야기를 살펴보면 고난의 연속이었다. 2주일 내로 곡을 다 만들어 스포팅 세션(spotting session, 어떤 장면에 음악을 넣을지 결정하는 것)까지 끝냈는데, 감독이 편집을 다 바꿔버린 것이다. 당연히 스포팅이 어긋나버렸기 때문에 곡 길이를 다시 맞춰야 했다. 1980년대 중반이었다. 사카모토 류이치는 완전 아날로그 방식으로 계산기를 두드려가면서 몇 마디 혹은 몇 초를 빼거나 더해야 했다. 감동적인 일이 없지 않았다. ‘레인’을 완성해 처음으로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들려준 날이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음악을 틀었는데 현장의 모두가 “벨리시모(Bellissimo, 아름답다), 벨리시모”를 외치면서 껴안고 난리가 났다고 한다. 역시, 이탈리아인들이란.

이 곡을 포함해 사카모토 류이치가 창조해낸 음악을 다시 한번 쭉 감상하면서 다시금 깨달았다. 뭐랄까. 돌이켜봐도 대중음악 역사상 그만큼 광대한 음악적 영토를 개척한 인물은 몇 되지 않는다. 그는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 활동을 통해 시대를 앞선 전자음악을 선보였다. 그러다가 영화음악에 투신해 아카데미 트로피를 거머쥐었고, 어떤 음반에서는 전자음을 배제한 월드 뮤직을 통해 찬사를 이끌어냈다. 오직 피아노 하나만으로 완성한 (영화) 음악도 있었는가 하면 〈레버넌트〉 같은 작품에서는 미니멀리즘적 성취로 동시대 음악가들의 찬탄을 불러왔다. 오헤이건의 문장을 다시 한번 빌리자면 ‘그의 유산은 앞으로도 영원히 훌륭하게 나이 먹어갈’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차마 부치지 못한 마음의 편지를 이 글로 대신한다.기자명배순탁 (음악평론가)다른기사 보기 [email protected]#사카모토 류이치#마지막 황제#Rain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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