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무심코 내뱉는 단어와 말들은 사유의 게으름을 일깨워 준다. 얼마 전 지인들에게 <뉴스타파>에 대한 얘기를 건네다 돌아온 한 마디가 있었다. “어디에서 하는 건데?”, “방송사가 아니고…” 그랬다. <PD수첩>이나 <추적60분> 모두 늘 앞에는 MBC와 KBS라는 단어가 붙었던 복합명사였다. 그러나 <뉴스타파>는 앞에 무엇을 붙여야 할까? 갑자기 “해직 언론인들이 만든 방송”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내뱉은 말이 생경해졌다. “해고 노동자”라는 말은 그렇게 많이 써왔는데, 왜 난 유독 언론계에서 해고된 이들에겐 이 명칭을 쓰지 않았을까? 해고와 해직의 차이는 무엇이며, 언론 노동자가 아닌 언론인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나? 순간 “해직 언론인들이 만든 주류 미디어가 다루지 못한 뉴스”라는 <뉴스타파>의 긴 수식어가 낯설어졌다.

해고된, 그러나 노동할 수 있는 노동자

일반적인 의미에서 노동자, 정확히 말해 자본주의 아래 임노동자들은 봉건제 생산양식과 비교할 때 모순된 두 자유 사이를 왕래하는 이들이다. 하나는 영주와 같은 이들로부터의 예속을 벗어나 누구에게나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할 수 있는 자유(freedom)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오직 노동력만을 소유한, 그래서 자신의 노동을 실현할 어떤 생산수단도 갖지 못한 결여(free of)가 동반된 자유이다. 해고가 ‘고용해지’라는 순간이 아닌 지속된 상태를 뜻한다면, 그것은 노동력을 판매할 자유를 박탈당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노동을 실현할 어떤 대상 또한 찾지 못한 결여의 상태, 곧 삶을 송두리째 비워야 할 고통의 상태를 뜻한다. 바로 그렇기에 “해고는 살인”이다. 그러나 만일 해고된 노동자가 자신을 고용할 자본은 여전히 찾지 못하지만, 그 노동력을 실현할 대상은 찾을 수 있다면? 어리석은 질문이다. 쌍용 자동차의 해고 노동자들에게 완성차를 만들 수 있냐고 물어보는 것과 똑같은, 그야 말로 먹물의 상상력이다.

그러나 언론 노동자들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이들의 노동력이란 육체적 노고와 함께 지적인 노고를 동반한다. 물론 제조업의 노동자들도 지적 숙련이 노동력의 일부를 이룬다. 하지만 언론 노동자들에게 그 노동력을 실현할 수 있는 생산수단은 자동차의 생산라인만큼 거대한 고정자본은 아니다. 적어도 그들에게 지금의 미디어 환경은 기존의 주류 방송사만큼은 아니라도 자신들의 취재와 그 결과를 유통시킬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타파>의 존재는 바로 그런 해고된 언론 노동자의 특수성을 우리의 눈앞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여전히 해고된 노동자이며 임노동자가 아니다. 노동력을 실현할 생산수단은 가졌으되, 그 노동력은 미디어 자본에게 판매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현직에 있었을 때보다 열악한 제작환경과 더 이상 자신이 속했던 매체의 이름으로 취재를 할 수 없다는 약점은 더 많은 노동 강도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임금을 대가로 노동력을 판매하지는 못하면서 정작 자신들의 노동을 실현할 대상은 갖고 있다는 모순. 이 모순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미디어와 사회의 관계를 돌아보게 해준다.

미디어 “와” 사회라는 분리를 넘어

일반적인 산업부문과 달리 언론 노동자들에게 해고란 좀 더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기자와 PD의 신분으로 파업 현장을 취재하고 해고 노동자들을 인터뷰하며 ‘그들’에 대한 리포팅을 할 때, 전통적인 저널리즘과 보도국 조직의 위계는 이들에게 객관성과 거리두기(detachment)를 요구한다. 이러한 요구가 더 이상 요구가 아니라 언론 노동자들에게 체화될 때, 이들은 자신이 만드는 미디어가 사회 밖에 위치한 냉정한 감시자가 되어야 함을 저널리즘의 제1원칙으로 숭앙한다. 이 원칙의 힘은 놀라울 정도다. 자사의 수익보전을 위한 리포팅을 하고, 다른 노조와 다를 바 없이 임단협을 체결하며, 때론 자신의 취재원이었던 정치권에 몸을 담게 된다 해도 여전히 사회 밖에 위치하며 이를 냉정히 감시해야 한다는 언론인의 소명(calling)은 무너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저널리즘의 고유한 이데올로기인 “사회를 거울처럼 반영하는 미디어”, 나아가 미디어 “와” 사회라는 기만적 분리는 언론학자들이 아닌 미디어 종사자들 스스로가 구축해 온 셈이다.

이런 까닭에 언론 노동자에게 해고란 특별하다. 지속되는 상태로서의 해고를 통해 자신이 속했던 미디어라는 조직의 외부, 아니 그들이 그토록 거리를 두며 냉정히 바라보고자 했던 사회라는 “바깥”에 던져지는 참혹함이기 때문이다. 1985년 <말>지의 창간 이래 한국의 해고된 언론 노동자들의 언론 활동에 ‘진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면, 그들이 벗어난 언론사라는 조직을 사회와 분리된 감시자가 아닌 자신을 해고한 사회의 또 다른 일부임을 온 몸으로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적어도 내게 <뉴스타파>의 존재는 <나꼼수>와 동급의 대안매체로 보이지가 않는다. 두 회에 걸친 <뉴스타파>의 보도와 미디어 비평은 미디어 “와” 사회(media "and" society)라는 기만적 분리를 거부하고 사회 안에서, 그리고 사회를 통하여 존재한다는 미디어의 실존(media in and through society)을 주류 미디어 밖에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투쟁의 현재진행형, <뉴스타파>

<뉴스 타파>에 대해 지인과 나누던 대화에서 갑자기 낯설어졌던 “해직 언론인”이란 단어가 이젠 생경해지지 않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해고된 노동자라는 바깥의 정체성과 언론인이라는 내부의 정체성을 오가는 이들. 2회 방송에서 노종면 앵커가 재능교육 해고 노동자들과의 인터뷰를 소개하며 말한 “일터에서 쫓겨난 노동자 아닌 노동자”라는 멘트. 그리고 이어진 인터뷰 영상에 올려진 “이근행/ 해직PD”와 “유명자/ 재능교육 노조위원장(해고자)”라는 프로필은 늘상 보던 뉴스 앵커의 멘트이자 자막이 아니었다. 이근행PD가 유명자 위원장에게 던지는 질문은 우리가 바로 그에게도 동일하게 물었을 질문들이었고, 노종면 앵커의 멘트 속에는 우리가 <뉴스타파>의 해고된 노동자들을 소개할 때 떠올릴 단어들이 있었다. 해고된 언론인과 해고된 비정규직 학습지 노동자의 처지가 분명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결여된, 오로지 자신들의 몸만이 미디어가 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과 오직 미디어만을 통해 자신들의 노동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만남을 “연대”라고 부른다면 지나친 감정의 과잉인가.

미디어 밖의 미디어로 등장한 <뉴스타파>는 그래서 대안 언론이라는 이름만으로 부르기엔 너무 부족하다. 언젠가 <뉴스타파>의 해직 언론인들이 복직될 그때, 기계적 중립성과 기만적 관찰자의 시선을 거두고 <뉴스타파>의 존재로 증명한 미디어의 실존이 그 현장에서도 지속되길 간절히 바란다. “공정방송”을 외치며 해고된 이들의 투쟁은 그래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 때론 안에서의 제작거부보다 밖에서의 제작수행이 더 강력한 투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은 <뉴스타파>를 통해 너무도 힘겹게, 그리고 너무도 고맙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